창작시

고요한 물결

minhang 2020. 12. 1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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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물결 /이정화

 

 

 


비 오는 날에 당신과 나는  우산을 들고 버스를 탑니다.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내려서 우리는 칼국수 집으로 향했지요.

TV 방송에도 나왔다는  유명한 칼국수 집인데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줄 서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조용한 칼국수 집으로  들어갑니다.

 

찬양 칼국수였던가요?

그런데  전혀 찬양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한참을  두리번거렸지요. 

좁은 식당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포화상태였어요 

한참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겨우 한 자리 차지하고  바지락 칼국수를 먹었지요  

당신은  땀을 흘리며 두 그릇을  가뿐히 먹어치우고

나는  돌이 씹히는 바지락 칼국수를  띄엄띄엄 먹었어요.

숙제를 다 마치고  우리는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어요 

세종대왕이  새롭게 들어서는 바람에  

이제는  이순신 장군이 경호실장으로  전락했다는

당신의 말을 유머로 들으면서  교보문고로  갔어요.

최근에 나온  내 시집을  구경하려고 갔는데요 

잘 보이는 진열대 위에는 

유명세를 타는 시인 작가들의 시집만 누워있고

내 시집은  비좁은 서가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었어요

 

저렇게 많은  책들 속에서 나의 시집은  고요한 물결 같은 것.

내 고요가 그대에게 닿으면 당신은  나를  돌아볼까요 

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이방인처럼 당신은 나를  그저 모른 척 지나치게 될까요 

 

청계천에서  우산을 쓴 채 사진을 찍었어요 

나는 안 찍겠다고  하고 당신은 자꾸만 나를 찍어주겠다고 하고,

나보다는  나를 담고 있는 배경에 더 관심이 많은 당신이 

웬지 낯설게 보이던 그날  당신은 어느새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한국크리스천문학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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