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물결 /이정화
비 오는 날에 당신과 나는 우산을 들고 버스를 탑니다.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내려서 우리는 칼국수 집으로 향했지요.
TV 방송에도 나왔다는 유명한 칼국수 집인데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줄 서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조용한 칼국수 집으로 들어갑니다.
찬양 칼국수였던가요?
그런데 전혀 찬양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한참을 두리번거렸지요.
좁은 식당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포화상태였어요
한참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겨우 한 자리 차지하고 바지락 칼국수를 먹었지요
당신은 땀을 흘리며 두 그릇을 가뿐히 먹어치우고
나는 돌이 씹히는 바지락 칼국수를 띄엄띄엄 먹었어요.
숙제를 다 마치고 우리는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어요
세종대왕이 새롭게 들어서는 바람에
이제는 이순신 장군이 경호실장으로 전락했다는
당신의 말을 유머로 들으면서 교보문고로 갔어요.
최근에 나온 내 시집을 구경하려고 갔는데요
잘 보이는 진열대 위에는
유명세를 타는 시인 작가들의 시집만 누워있고
내 시집은 비좁은 서가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었어요
저렇게 많은 책들 속에서 나의 시집은 고요한 물결 같은 것.
내 고요가 그대에게 닿으면 당신은 나를 돌아볼까요
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이방인처럼 당신은 나를 그저 모른 척 지나치게 될까요
청계천에서 우산을 쓴 채 사진을 찍었어요
나는 안 찍겠다고 하고 당신은 자꾸만 나를 찍어주겠다고 하고,
나보다는 나를 담고 있는 배경에 더 관심이 많은 당신이
웬지 낯설게 보이던 그날 당신은 어느새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한국크리스천문학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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