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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6

가을 노래 가을 노래 /이정화 가을이 떠나고 있는 자리에 빛이 내린다 가을은 먼 곳에서 찾아와서 마디마다 삶의 노래를 엮어내고 이제 홀연히 떠나고 있다. 은행잎에 물든 가을의 소망은 한가닥 꿈이었을까. 잎이 지는 거리 낙엽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가을의 꿈은 다만 그것만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은 어둠 속에서 불어와서 허망의 빛을 잠재우고 무엇이 서러워서 밤새워 소리없이 흐느껴 우는 것일까. 빛이 내리는 벌판에 서면 손금처럼 묻어 나오는 진한 목숨의 빛깔. 여름날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침묵 속에서 가을은 오고 단풍잎처럼 뜨거운 소망을 남긴 채 바람 부는 겨울 속으로 가을은 이제 떠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저무는 푸른 강변에 서서 이루지 못한 꿈들을 강물에 씻고 눈물로 조그맣게 띄워 보내면 물결마다 굽이쳐.. 2020. 11. 16.
핫케잌을 굽는 시간 핫케잌을 굽는 시간 / 이정화 우유와 계란으로 잘 섞인 반죽을 한 국자 떠서 부으니 둥근 프라이팬 위에서 스스로 둥글게 자리 잡고 눕는다 반죽이 너무 질었을까 염려하던 마음도 잠시 어느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무수한 기포들 작은 구멍마다 알 수 없는 환희가 샘솟는 그 언저리에서 언제쯤 뒤집어야 가장 알맞게 익을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망설이다가 순식간에 결단의 시간을 놓치고 만다 아차 하며 재빨리 뒤집은 찰라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버린 반쪽 가슴 멍울지던 기포의 아득한 추억도 다 잊어버리고 썰물이 지나간 해안선처럼 둥근 테두리에 흑갈색 흔적만 상처로 남는다. -한국크리스쳔문학 2011 가을호 Time to bake hot cake I'm gonna pour a nice mixture of milk a.. 2020. 11. 9.
시세계 발표시/옷 무덤 탐구법 옷 무덤 탐구법 /이정화 이천일 아울렛 야외매장에 가면 옷 무덤이 있다 철 지난 옷들과 팔다가 남은 옷들이 한데 뒤엉겨 커다란 봉분을 쌓았다 옷 무덤을 파헤치다 보면 간혹 뜻밖의 행운을 만나기도 하지만 사이즈가 한 치수 작거나 크기도 하고 구김살이 너무 심해서 후줄근하다 전업 주부들은 오전부터 이곳에 와서 출근 도장을 찍고 아울렛 매장을 전전하다가 최후의 보루로 옷 무덤을 탐구하는 것인데 서로 좋은 물건을 차지하려고 옷의 팔과 다리를 함부로 잡아당기기도 하고 죄 없는 옷의 머리채를 잡고 앞뒤로 흔들기도 하면서 옷 무덤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옷들은 탈진하여 여기저기 나자빠져 있고 하늘 높이 쌓아 올린 봉분은 어느새 납작해져 있다 전리품처럼 획득한 옷가지들을 한가득 품에 안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서는 사.. 2020. 10. 20.
붕어빵을 굽는 여자 한국크리스쳔문학 발표시/ 붕어빵을 굽는 여자 붕어빵을 굽는 여자 / 이정화 젊은 여자가 붕어빵을 굽고 있다 은행잎이 한창 물들어가고 있던 가을날 오후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가 보았다 횡단보도 앞 신호등 옆에서 잘 익은 가을을 단 한번에 뒤집던 여자 사람들은 줄서서 겨울을 기다리고 있는데 노랗게 익은 가을을 봉지에 가득 담아주던 여자 머플러를 두르고 앞치마를 입고 바람의 사연을 여유있게 들으며 나뭇잎의 경전을 한 순간에 독파하던 여자 한 여자가 가을을 굽고 있다 레테의 연가를 읽으며 붕어빵과 잉어빵 사이에서 시간의 줄타기를 하던 그때 가을 골목길 한 모퉁이가 붉게 물든 단풍잎처럼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 한국크리스천문학 2015년 가을호 2020. 10. 18.
시문학 발표시/취소와 등록 버튼 사이에서/세상을 클릭하다 취소와 등록 버튼 사이에서 /이정화 밤이 어둠의 장화를 신고 걸어나온다 블랙홀에서 샛노란 별들이 쏟아진다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잠든 장미 오리온 자리와 페가수스 자리를 돌며 배회하던 북극성과 카시오페이아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남쪽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새벽을 부른다 내가 너에게로 달려 갈 동안 꽃들은 피어나고 새들은 지저귀고 구름이 변하여 비가 되어 내리겠지 내가 취소와 등록 버튼 사이에서 망설이는 동안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나갔는지 너는 먼 곳을 돌고 돌아 나에게로 왔는데 내가 너의 소매자락을 붙잡기가 너무 힘겨워 쉼표 하나에 표정을 바꾸고 물음표 하나에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너의 향기를 너의 미소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너에게로 달려 갈 동안 정지된 시.. 2020. 10. 15.
마침표 하나가 나의 길을 막는다 마침표 하나가 나의 길을 막는다 /이정화 스마트폰으로 시를 쓰는데 단어와 단어 사이에 마침표가 자동으로 찍힌다 문장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찍히는 마침표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핸드폰 화면은 자꾸만 꺼지고 내가 연출하지 않았는데 마른하늘에 천둥과 벼락이 내려치고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의도와는 다른 말들이 거미처럼 불쑥 기어 나오고 내가 미처 물을 주지 않았는데 양파에 새싹이 돋아나고 내가 가벼운 시선 한번 던지지 않았는데 아파트 화단 위에서 제라늄은 붉게 피어나고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너는 등을 돌리며 떠났다 풀잎에게 바람의 언어를 배우고 별들에게 마침표의 행방을 물어본다 마침표 하나로 너의 모습이 바뀌던 어느날 저녁 -한국현대시 2020년 상반기호 2020.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