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창작시 23

꽃게탕을 끓이며

꽃게탕을 끓이며 / 이정화 ​ ​ 껍질째로 끓는 물에 집어넣으니 갑자기 열을 받았는지 온몸에 화색이 감돈다 삐죽삐죽 삐져나온 집게 발가락은 뜨거운 물에도 쉽게 풀어지지 않는 갑각류의 견고한 내력 ​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허망의 거품들을 걷어내고 나니 바다 향기 그윽한 꽃게의 맑은 눈물이 투박한 냄비 안에 가득히 고여 나온다 ​ 이제는 그대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야 한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생의 굴레에서 오랫동안 은밀하게 감추어 두었던 슬픔의 하얀 속살들을 한 점도 남김없이 드러내어야 한다 ​ -한국현대시 2023년 하반기호

창작시 2024.01.15

목련의 화법

목련의 화법 /이정화 목련을 처음으로 만나던 날 몹시 눈이 부셨다 봄이 처음으로 나에게 왔는데 꽃보다 잎이 나중에 피어나던 그의 어눌한 화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목련이 떨어지던 날 세상의 문이 닫혀지고 그는 나에게 등을 돌렸다 꽃잎이 떨어진 가지마다 푸른 희망의 등불이 켜지고 있었다 목련이 하얗게 다시 피어나던 날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그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났다 상처난 가슴을 열어 보이며 꽃잎은 침묵의 화법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국크리스천문학 2014년 겨울호

창작시 2023.04.14

버려야 할 것들

버려야 할 것들 / 이정화 입지 않는 옷들을 버렸다. 오래된 책들을 버렸다. 헌 장난감들을 버렸다. 쓰지 않는 가방들을 버렸다. 낡은 테이프들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버린다는 것은 끝이 없다. 또 무엇을 버릴 것인가 물건을 버리는 것은 아주 쉽다.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던져 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마음속에 쌓인 쓰레기 더미를 치우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진정 버려야 할 것들은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찌꺼기들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 그것은 평안을 향한 디딤돌이다. 버림으로써 더욱 자유로워지는 영혼의 평화.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창작시 2023.04.08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이정화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울지 마. 내 시월의 창들아 그 슬픈 눈으로 곱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지 마. 너의 흔들리는 그 눈빛으로 세상의 모든 빛을 끌 수 있다면 네 투명한 마음속에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너에게 악수를 건네리. 슬퍼하지 마 내 시월의 창들아 이렇게 넓은 세상 속에서 또 낙엽은 지고 연인들은 쓸쓸히 헤어지고 저만치서 이별과 절망의 발자국을 뚜벅뚜벅 울리며 겨울은 걸어오고 있는데 이제 우리, 두꺼운 외투를 하나씩 준비하자 그대와 나의 오랜 이별을 위하여. - 이정화 시집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중에서

창작시 2022.10.29

조명등 가게를 지나며

조명등 가게를 지나며 /이정화 비 내리는 오전 운전 연습을 하면서 보았다. 조명등 가게에 불이 환히 켜져 있는 것을. 몇 개였을까. 유리창 밖으로 그리움처럼 노란 등불을 하나씩 머리에 달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가게 안을 가득히 지키고 있던 조명등들의 소리 없는 함성들.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을까. 빛은 있으되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자의 슬픔. 비 내리는 날. 우울한 거리의 한쪽 모퉁이에서 희망처럼 환히 등불을 밝히고 제 한 몸 쓸쓸히 쓰러져가며 빛이 되어 어둠을 말없이 밝히고 있던 조명등 가게. 깨어있는 자의 슬픈 눈빛을 보았다. 잠들지 못하는 자의 고뇌를 읽었다. -이정화 시집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중에서 출처: https://jh-yie.tistory.com/1152 [꽃잎 살리기:티스토리]

창작시 2022.08.25

너에게로 또다시

너에게로 또다시 / 이정화 너에게 가기 위해서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너에게 다시 가기 위해서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무수한 정거장을 지나고 낯선 사람들과 여러 가게들을 지나왔다 너에게 가는 길은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워 너에게 가기까지 내가 거쳐온 빛바랜 골목길들 내가 키우던 장미꽃은 언제부터인가 꽃을 피우지 않는다 너에게 가기까지 너무 많은 세월을 함부로 허비했다 구름은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지 별들은 또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네가 나를 불러도 너에게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은 불임의 계절 나는 너에게 이방인이다 너를 떠난 지 26년째. 출처: https://jh-yie.tistory.com/1151 [꽃잎 살리기:티스토리]

창작시 2022.08.23

바다를 그리고 싶다

바다를 그리고 싶다 /이정화 바다를 그리고 싶다 적막한 바닷가 외딴 곳에서 파아란 물감으로 하얀 도화지를 물들이면 내 마음의 여백마다 투명한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그대. 꽃잎을 그리고 싶다. 따스한 베란다 화분 앞에 앉아서 핑크빛 파스텔로 하얀 도화지를 칠하면 내 마음의 여백마다 부드러운 사랑으로 번져나는 그대. 하늘을 그리고 싶다. 구름을 그리고 싶다. 별을 그리고 싶다. 노래하고 싶다. 꽃처럼 새처럼 가볍게 하늘을 날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 날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가만히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이정화 시집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중에서 출처: https://jh-yie.tistory.com/1149 [꽃잎 살리기:티스토리]

창작시 2022.08.20

애드센스 광고와 씨름하는 저녁

애드센스 광고와 씨름하는 저녁 / 이정화 시인이 시는 쓰지 않고 날마다 애드센스를 한다. 티스토리 블로그를 시작한 지 어느새 2년 애드센스를 처음으로 승인받았을 때의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도대체 애드센스가 뭐길래 도대체 애드핏이 뭐길래 나는 날마다 광고와 씨름하고 있는 것일까? 하루에도 몇번씩 티스토리 블로그를 드나들며 애드센스를 달았다가 떼었다가 애드핏을 삭제했다가 다시 달았다가 사이드바 광고를 달았다가 삭제했다가 이 더운 여름날에 애드센스 광고와 씨름하며 하루를 보낸다. 오늘은 어떤 광고가 내 블로그에 달려 있는지 내일은 어떤 광고가 내 블로그에 달려있을지 그것이 왜 나는 궁금한 것일까? 애드핏과 애드센스 광고 사이에서 줄달음질하는 저녁 나는 어느새 광고의 푸른 물결 속으로 한없이 침잠해가고 있다..

창작시 2022.07.30

유성

유성 /이정화 어디서 오시는가 천 리 만 길 머나먼 곳에서 어둠의 계단을 가볍게 밟고 오시는 이 그대가 디딘 발걸음마다 은하의 강물이 눈물처럼 흐르고 어둠 속에서도 숨죽이며 반짝이는 별들의 은밀한 교신 풀잎들은 허리를 곧추 세우며 밤새워 그대가 남기고 간 한 줄의 편지를 해독한다 기억의 사립문 밖으로 오랜 사랑이 그리워질 때 그대는 반딧불처럼 어둠을 살라 황홀한 빛을 내리라 그대의 등 뒤로 곧고도 반듯한 길 하나가 마침내 아름답게 만들어지리라. - 이정화 시집 [내 고요가 그대에게 닿아] 중에서 출처: https://jh-yie.tistory.com/1138 [꽃잎 살리기:티스토리]

창작시 2022.07.17

바나나가 익어가는 시간

바나나가 익어가는 시간 / 이정화 구름의 뿌리를 찾아 헤매네 리모컨으로 아침을 열고 당신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푸틴이 크림을 먹어버렸네 석방을 선망으로 잘못 읽은 나는 푸른 양철 대문을 열고 하숙집 할머니가 걸어 나오네 두부의 밑면이 까맣게 타버리고 데리다를 읽다가 그만둔 갈색 테이블 위에서 둥글게 웅크리고 있는 사유의 시간들이 점점이 박혀있네 장미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지 비밀의 문이 열리고, 닫히고 이제는 열쇠가 필요 없는 당신의 정원은 너무 아늑해 부드러운 껍질을 벗기면 속 깊은 고요가 한가득 플라스틱 바구니 속에서 하루는 노랗게 익어갈 것이고 -한글문학 2018년 봄, 여름호

창작시 2022.04.2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