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시

매니큐어를 칠하다

minhang 2021. 1. 27.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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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큐어를 칠하다

              /이정화

 

 

몇 년이나 되었을까

오래 묵어 곰삭은 용기 뚜껑 한 모서리

은빛 에나멜 칠이 군데군데 벗겨졌다

아직도 자존심은 살아서

쉽게 열어 보이지 않는 깊은 속내

꼿꼿한 허리는 구부릴 줄 모른다

타협의 여지 없이

서둘러 시간의 뚜껑을 돌려 세우니

코끝을 자극하는 강한 휘발성 냄새

농도를 조절하며 손톱에 펴 바른다

 

어머니는 손끝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일상은 잘 마른 빨래처럼 건조했고

한번씩 던지는 문장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슬쩍 나이를 지우고

지나온 흔적을 반짝이는 펄로 덧칠하면

오랜 세월을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던

보랏빛 추억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잠시 방심한 사이

무심코 손끝이 스쳐 지나간 자리엔

움푹 패인 흔적만 상처로 남았다

 

두꺼울수록 쉽게 마르지 않는 휘발성의 시간들

기다림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지문으로 남아

눈부신 수평선을 팽팽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매끄럽게 코팅된, 빛나는 원색의 하루

 

<한국크리스쳔문학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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