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시

잔치 국수

minhang 2021. 4. 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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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국수 /이정화

 

국수를 삶는다

만지면 바스러질 것처럼 가녀린 몸뚱이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단 한마디의 비명 소리도 지르지 않고

바싹 마른 몸이 물기를 머금어

부드럽고 찰 진 면 가닥으로 다시 태어난다

 

시누이 결혼식날 먹었던 잔치 국수 한 그릇

왜 그렇게 배가 고프던지

결혼식이 끝나고 대구로 돌아가던 날

허기진 탓인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국수를 먹으면 국수처럼 길고 오래 산다고

결혼식날 손님상에 차려 놓던 잔치 국수

이제는 잔치 벌일 일도 없는 집에서

저녁 한 끼를 간단히 해결하려고

잔치 국수를 삶는다

 

가늘게 채 썬 호박과 계란 지단을

국수 위에 고명으로 살포시 얹어 놓고

시원한 멸치 국물을 한 대접 가득히 붓는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가난한 밥상 위에서

잔치 국수는 반가운 존재가 된다

 

국수 한 그릇으로

김치 한 접시와 단무지 몇 조각이 전부인

온 가족의 행복한 잔치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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