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칼럼

침묵의 향기로 피어나던 언어

minhang 2020. 8. 2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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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방송국의 스크립터 일을 그만두고, 드라마 작가를 꿈꾸며 허름한 자취방에서 

드라마 습작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거의 대화와 대화의 연결이 대부분인 드라마 대본을 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60분짜리 TV 드라마 대본을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며 한편 쓰고 나면, 

내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말아서 나는 거의 파김치가 되곤 했었다. 

 


 드라마는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아주 실감 나게 그려내야 한다. 

소설과는 달리 드라마는 TV라는 영상매체를 통해서 시청자들에게 곧바로 전달되기 때문에,

너무 환상적이어서도 안되고 또한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도 안된다.

 

 나는 그때 드라마 대본을 쓰면서 현실과 가상의 딜레마 속에서 날마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나의 체험을 그대로 드라마 대본으로 써서 담당 PD에게 제출하면

그는 나의 작품을 읽어 보더니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같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 다음에는 허구의 이야기를 드라마 대본으로 써서 보여주었더니,

그는 무릎을 치면서 드라마는 바로 이렇게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나에게 그 드라마 대본이 틀림없이 나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아니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는 끝까지 나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서 그 당시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고, 

드라마 대본을 쓰는 것에 대해서 일말의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신정동의 어느 서민 아파트에서 방 한칸을 빌려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그곳은 미개발지여서 비가 내리면 온 동네가 진흙탕으로 변하는 곳이었다. 

그때 유일한 즐거움이라면 오목교 근처에서 시내 버스를 타고 

가까운 영등포 시장으로 나가서 아이 쇼핑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도 영등포 시장 일대를 누비며 이것 저것을 구경하다가 아무것도 산 것 없이

 빈 손으로 자취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저녁 무렵이어서 버스 안에는 빈 자리가 없었다.

나는 비교적 버스 앞문에서 가까운 자리에서 버스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서 대여섯 명의 남녀 청소년들을 태우고 다시 출발하였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들은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모두가 다 잘 생기고 아주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그저 평범한 남녀 고등학생들이려니 생각하고, 다시 나의 시선을 거두어서 창밖을 응시하며

흔들리는 버스에 중심을 잘 잡으려고 애쓰면서 버스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런데 내 등 뒤에서 분명히 그들이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전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었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런데 그들이 수화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손짓과 몸짓으로 침묵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순간,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정지하고 모든 소리들이 빛을 잃고,

단지 그들만의 소리없는 언어들이 은빛 날개를 타고 잔잔하게 하늘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 소리나는 언어들의 부질없음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침묵속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슴이 시렸다.   

  이제는 잊혀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그날의 일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만일 누가 내 인생의 풍경 속에서 가장 감동적인 그림을 한 장 고르라고 한다면 

그때의 그 풍경을 고르고 싶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이 나누던 침묵 속의 대화들이 잔잔한 물결처럼 내 마음속으로 밀려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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