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창작시 23

아침 소묘

아침 소묘 /이정화 비발디의 사계와 함께 시작되는 아침 거실에는 잔잔한 바이올린의 선율이 꿈결처럼 흐르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커피 주전자가 첫 만남의 설렘처럼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 불현듯이 다가오는 물빛 그리움 내 삶의 여백 위에 날마다 고운 노을빛으로 물들어져 간다. 문득, 창밖으로 바라본 하늘은 청자빛 도자기처럼 눈부시게 푸르고 나의 사랑은 향기로운 커피처럼 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 없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정화 시집, [내 고요가 그대에게 닿아] 중에서

창작시 2022.04.20

잔치 국수

잔치 국수 /이정화 국수를 삶는다 만지면 바스러질 것처럼 가녀린 몸뚱이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단 한마디의 비명 소리도 지르지 않고 바싹 마른 몸이 물기를 머금어 부드럽고 찰 진 면 가닥으로 다시 태어난다 시누이 결혼식날 먹었던 잔치 국수 한 그릇 왜 그렇게 배가 고프던지 결혼식이 끝나고 대구로 돌아가던 날 허기진 탓인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국수를 먹으면 국수처럼 길고 오래 산다고 결혼식날 손님상에 차려 놓던 잔치 국수 이제는 잔치 벌일 일도 없는 집에서 저녁 한 끼를 간단히 해결하려고 잔치 국수를 삶는다 가늘게 채 썬 호박과 계란 지단을 국수 위에 고명으로 살포시 얹어 놓고 시원한 멸치 국물을 한 대접 가득히 붓는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가난한 밥상 위에서 잔치 국수는 반가운 존재가 된다 ..

창작시 2021.04.07

봄날의 방정식

봄날의 방정식 /이정화​ ​​봄이라는 방정식을 풀어 본다여름은 잠시 접어 두고봄을 괄호 속에 집어넣어인수분해를 해본다​봄을 잘게 나누어갈수록수선화가 노랗게 기침을 하고햇살처럼 퍼져 나가는 시간의 향기 괄호와 괄호를 묶어서 곱하고더하기와 빼기를 적당히 섞는다봄을 괄호 속에서 다시 빼내고꽃의 삼각 함수를 구한다​봄날의 이원 일차 연립 방정식미분과 적분의 세계를 넘나들다가아지랑이는 갈 길을 잃어버렸다봄을 무한대로 리미트 할 것​봄의 그래프 위에꽃의 좌표를 붉은 점으로 표시한다x축과 y축이 만나는 지점에서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리고새들이 일제히 노래하기 시작한다 봄날의 기울기를싸인과 코싸인, 탄젠트로 측정하고나는 괄호 밖으로 걸어 나온다​​​- 시문학 2015년 4월호

창작시 2021.04.02

매니큐어를 칠하다

매니큐어를 칠하다 /이정화 몇 년이나 되었을까 오래 묵어 곰삭은 용기 뚜껑 한 모서리 은빛 에나멜 칠이 군데군데 벗겨졌다 아직도 자존심은 살아서 쉽게 열어 보이지 않는 깊은 속내 꼿꼿한 허리는 구부릴 줄 모른다 타협의 여지 없이 서둘러 시간의 뚜껑을 돌려 세우니 코끝을 자극하는 강한 휘발성 냄새 농도를 조절하며 손톱에 펴 바른다 어머니는 손끝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일상은 잘 마른 빨래처럼 건조했고 한번씩 던지는 문장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슬쩍 나이를 지우고 지나온 흔적을 반짝이는 펄로 덧칠하면 오랜 세월을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던 보랏빛 추억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잠시 방심한 사이 무심코 손끝이 스쳐 지나간 자리엔 움푹 패인 흔적만 상처로 남았다 두꺼울수록 쉽게 마르지 않는 휘발성의 시간들 기다림은 오래도록..

창작시 2021.01.27

샬롬 미용실

샬롬 미용실 /이정화 헤어 드라이어로 축축해진 일상을 건조시킨다 고데기로 굴곡진 인생을 직선으로 정리하고 사도신경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구름의 머리에 화학 약품을 바르고 노란 비닐 장갑을 낀 손으로 거룩하게 안수한다 꽃들이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시간의 마디가 싹둑 잘려 나간다 비맞은 잎새처럼 후줄근해진 주보지 한 장 그녀의 손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 노을이 그녀의 가게를 기웃거린다 양복과 넥타이가 그녀의 목을 조인다 노을이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춘다 그녀가 노을에게 잘 익은 사과를 건넨다 노을은 그녀에게 벗을 수 없는 짐이다 날마다 그녀는 구름을 바라보고 노을의 말씀을 묵상한다 주기도문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노을이 그녀의 가슴에 별을 달아준다 샬롬의 불빛이 꺼지고 그녀는 노을의 안식 속으로 들어간다..

창작시 2020.12.27

고요한 물결

고요한 물결 /이정화 비 오는 날에 당신과 나는 우산을 들고 버스를 탑니다.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내려서 우리는 칼국수 집으로 향했지요. TV 방송에도 나왔다는 유명한 칼국수 집인데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줄 서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조용한 칼국수 집으로 들어갑니다. 찬양 칼국수였던가요? 그런데 전혀 찬양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한참을 두리번거렸지요. 좁은 식당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포화상태였어요 한참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겨우 한 자리 차지하고 바지락 칼국수를 먹었지요 당신은 땀을 흘리며 두 그릇을 가뿐히 먹어치우고 나는 돌이 씹히는 바지락 칼국수를 띄엄띄엄 먹었어요. 숙제를 다 마치고 우리는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어요 세종대왕이 새롭게 들어서는 바람에 이..

창작시 2020.12.11

[시문학 발표시] 신산 체육사

신산 체육사 /이정화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 285-187번지 '신산리 체육사'로 인터넷에서 검색했더니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던 신산 체육사의 주소를 네비에 찍고 그곳에 도착하던 날 아들 또래의 군인 한 명 군복 바지를 수선하고 있었다 가게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군용 물품들 주인 여자는 쉴 새 없이 미싱을 돌리고 아들은 이병에서 일병으로 계급장을 바꿔 달았다 5월의 햇살 아래에서 칙칙한 군복이 너무 무거워 보이던 그때 벽돌 한 장 더 얹었을 뿐인데 너무 즐거워하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어린다 지금도 그곳에는 시간의 페달을 밟으며 누군가 계급장을 바꿔 달고 기한이 다하기 까지는 결코 벗을 수 없는 푸른 의무를 수선하고 있으리라 시간의 물레바퀴를 돌리며 한 땀 한 땀 인고의 결실을 촘촘히 박음질하고..

창작시 2020.11.27

가을 노래

가을 노래 /이정화 가을이 떠나고 있는 자리에 빛이 내린다 가을은 먼 곳에서 찾아와서 마디마다 삶의 노래를 엮어내고 이제 홀연히 떠나고 있다. 은행잎에 물든 가을의 소망은 한가닥 꿈이었을까. 잎이 지는 거리 낙엽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가을의 꿈은 다만 그것만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은 어둠 속에서 불어와서 허망의 빛을 잠재우고 무엇이 서러워서 밤새워 소리없이 흐느껴 우는 것일까. 빛이 내리는 벌판에 서면 손금처럼 묻어 나오는 진한 목숨의 빛깔. 여름날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침묵 속에서 가을은 오고 단풍잎처럼 뜨거운 소망을 남긴 채 바람 부는 겨울 속으로 가을은 이제 떠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저무는 푸른 강변에 서서 이루지 못한 꿈들을 강물에 씻고 눈물로 조그맣게 띄워 보내면 물결마다 굽이쳐..

창작시 2020.11.16

핫케잌을 굽는 시간

핫케잌을 굽는 시간 / 이정화 우유와 계란으로 잘 섞인 반죽을 한 국자 떠서 부으니 둥근 프라이팬 위에서 스스로 둥글게 자리 잡고 눕는다 반죽이 너무 질었을까 염려하던 마음도 잠시 어느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무수한 기포들 작은 구멍마다 알 수 없는 환희가 샘솟는 그 언저리에서 언제쯤 뒤집어야 가장 알맞게 익을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망설이다가 순식간에 결단의 시간을 놓치고 만다 아차 하며 재빨리 뒤집은 찰라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버린 반쪽 가슴 멍울지던 기포의 아득한 추억도 다 잊어버리고 썰물이 지나간 해안선처럼 둥근 테두리에 흑갈색 흔적만 상처로 남는다. -한국크리스쳔문학 2011 가을호 Time to bake hot cake I'm gonna pour a nice mixture of milk a..

창작시 2020.11.09

시세계 발표시/옷 무덤 탐구법

옷 무덤 탐구법 /이정화 이천일 아울렛 야외매장에 가면 옷 무덤이 있다 철 지난 옷들과 팔다가 남은 옷들이 한데 뒤엉겨 커다란 봉분을 쌓았다 옷 무덤을 파헤치다 보면 간혹 뜻밖의 행운을 만나기도 하지만 사이즈가 한 치수 작거나 크기도 하고 구김살이 너무 심해서 후줄근하다 전업 주부들은 오전부터 이곳에 와서 출근 도장을 찍고 아울렛 매장을 전전하다가 최후의 보루로 옷 무덤을 탐구하는 것인데 서로 좋은 물건을 차지하려고 옷의 팔과 다리를 함부로 잡아당기기도 하고 죄 없는 옷의 머리채를 잡고 앞뒤로 흔들기도 하면서 옷 무덤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옷들은 탈진하여 여기저기 나자빠져 있고 하늘 높이 쌓아 올린 봉분은 어느새 납작해져 있다 전리품처럼 획득한 옷가지들을 한가득 품에 안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서는 사..

창작시 2020.10.20
728x90
반응형